전후한 교체기에는 비록 금고문 논쟁이 일어났지만 한대의 유학자들은 오히려 시종일관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후세에서 고문을 높이고 금문을 낮춰보게 된 것은 혁명을 억제하려는 정부의 조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한 조치에 따라 후세의 경학은 대부분스스로를 고문' 이라고 하면서 훈고와 의소를러한 풍조 속에서 '책은 많이 섭렵하지만 응용할 줄 모르는 학자들이 양산되었다. 그렇지만 한유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음양오행을 통해 서술된 우주의 도덕 율령으로 인류 사회를 감시하였다. 그들은 혁명가들이었다. 현대적인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그들의 혁명 무기'는 오덕종시와 음양재이의중시하였다. 이벼한를 추론하여 위로부터의 사회개혁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하였다. 그들은 특히 왕의 실정 때때로 어느 정도 성과를..
유혹은 고문경학의 창시자이다. 한대 금고문학에관한 문제는 청대 이래 많은 학자들의 고증을 통해 이미 개괄적인모습이 드러나 있는데, 그것은 몇 가지 점으로 요약된다. 첫째, 고문경은 금문경보다 늦게 나타났으며, 대부분은 애제로 재직할 때 '발견' 되었다. 둘째, 고문경의 전승계통은 불분명하다. 곧 전래된 길이 분명하지 않다." 셋째, 금문경학의 핵심인 춘추공양전에 대항하는 춘추좌씨전은 유흠이 좌구명의 국어를 해체하여 필요한 부분을 춘추의 각 기사아래에 첨가함으로써 완성되었다. 곧 전문을 인용하여 경을해석하였다. 따라서 현존하는 국어는 유흠이 사하고 남은 부분에 불과하다. 애제 때 유흠은 고문경인 춘추좌씨전, 모시, 고문상서, 일례등을 학관에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금문학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다. 애제가 죽고 왕..
더욱 터무니없는 모습을 띠는 것은 위서이다. 위서는 해안화과정이 극에 달하였던 시대의 산물로서 신비주의적 색채가 더욱 농후한 체험세계를 보여준다. 우리의 안목에서 볼 때 이러한 세계는불가사의한 것이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에게는 확실히 진실한 세계였다.이제는 전해지지 않는 위서가 많다. 현존하는 문헌을 통해 살펴보면 위서는 대략 81편이다. 그 중에는 황제로부터문왕까지 역대 성인들이 전하였다는 하도9편과 낙서6편이 있고, 또 공자 등 아홉 명의 성인이 보충하였다는 하도, 낙서 30원이 있다. 그리고 칠위가 36편이다. 칠위는 시위 , '서위, 예위, 악위, 역위, 춘추위, 효경위를 말한다. 협의의 위서는 칠위만을 가리킨다.'위'는 '경'에 대한 말이다. 따라서 칠위는 오경에 대한 말이다.후한 초기에는 칠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