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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한 교체기에는 비록 금고문 논쟁이 일어났지만 한대의 유학자들은 오히려 시종일관 하나의 체계를 이루고 있었다. 후세에서 고문을 높이고 금문을 낮춰보게 된 것은 혁명을 억제하려는 정부의 조치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한 조치에 따라 후세의 경학은 대부분스스로를 고문' 이라고 하면서 훈고와 의소를러한 풍조 속에서 '책은 많이 섭렵하지만 응용할 줄 모르는 학자들이 양산되었다. 그렇지만 한유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은 음양오행을 통해 서술된 우주의 도덕 율령으로 인류 사회를 감시하였다. 그들은 혁명가들이었다. 현대적인 용어를 빌려 말한다면 그들의 혁명 무기'는 오덕종시와 음양재이의중시하였다. 이벼한를 추론하여 위로부터의 사회개혁을 시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하였다. 그들은 특히 왕의 실정
때때로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기도과 국가의 타락에 맞서서 활약하였다. 그래서 그들은 투옥되는 것을면할 수 없었다. 사마천, 동중서, 휴맹, 경방 등 고문경학을 창시한 유흠은 재이의 전문가이기도 하였다. 그는 한나라의 운세가 이미 쇠진한' 때 왕망을 도와 혁명을 성공시켰으며,일찍이 한 애제 건평 원년 유수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것은 적복부의 유수가 병사를 내어 무도한사람을 사로잡는다. 사방의 이민족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용이 들판에서 싸운다. 아울러 그는 경전을 인용하여 유수라는 이름을 가진 자가 왕망 이후 새로운 왕조의 개국 군주가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그가 후에 모반에 연루되어 왕망에게 살해당하였던 것도 그의 개명과 관련이 있다.
전후한 교체기에는 한대 유학자들의 체계가 극도로 발전하고 도삼도 광범위하게 유행하였다. 도참은 대부분 위서에서 기원한다. 예를 들어 공자가 천명을 받아 새로운 왕이 되고, 한나라를 위해 법을 제정한다는 참어는 원래 춘추공양전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실상 고문학자나 금문학자는 모두 도참을 신봉하였고, 참어를 만들어내기까지 하였다. 왕망의 찬탈은 도참의 힘을 빌린 것이었다. 그는"새롭게 천명을 받는다"는 참어에 근거하여 국호를 '신, 연호를 '시건국' 이라고 하였다.
도참은 일종의 특수한 '부응' 이다. 그것은 어렵고 심오한 이론을떠나 쉽고도 빨리 전파될 수 있는 참어를 통해 군중들에게 혁명의근거'를 보여줄 수 있다. 따라서 그것은 광범위한 대중성을 가지고 있다. 한대의 유학자들의 체계에서 천명의 부응은 '노력해서 될수 있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부응 관념은 진한 교체기에 이미 광범위하게 유포되기는 하였으나 '천명의 부응'을찾아내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었다. 진시황은 천하를 통일한 후오덕종시설에 따라 진나라는 주나라를 이었으니 수덕의 때이다라고 생각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가까운 곳에서 부응을 찾지 못하였기
때문에 5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 진 문공이 사냥을 나가 흑룡을 잡았다"는 전설을 수덕의 부응으로 해석하였다. 한나라의 경우에는 문제 때 '황룡이 나타남으로써, 처음으로 한나라가 토덕이라는 것이 주명되었지만 한 무제 때 덕성이 나타나서야 비로소 토덕에 따라 제도를 바꾸었다. 그러나 전후한 교체기에는 '천명의 부응'이 끊임없이 등장하였다. 부응의 언
어, 문자적 대체물인 참어는 모두 그러한 성질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천명을 받으려는' 생각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자기에게 필요한 참어를 찾아낼 수 있었고, 참어는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사용되기도 하고 혁명을 위해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체험세계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은 도참을 굳게 믿었다. 후한 광무제 유수가 적복부를이용하여 천자가 된 것도 참어에 따른 것이었다. 더욱이 그는 즉위한 후 도참에 근거하여 정사를 판단하고, 관리를 임명하였다. 그것은양날을 가진 칼이었으며, 창조의 변질이었다. 한대 유학자들의 진실한 사상은 점차 도참에 가려 빛을 잃게 되었다.
후한시대는 도참에 의해고착되고 주조된 세계였다. 장형은도참을 반대하였던 극소수 인물 가운데 하나였는데, 그의 노력은'원형과 진실로 복귀하려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도참에 대한장형의 궁극적인 평가는 진실로 사실적인 일이 드러나기 어렵고 허위가 그치지 않는다", 도위는 허망한 것이며, 성인의 학문이아니다라는 것이었다. 그는 참위를 만든 자를 세상을 속이고 풍속을 어지렵히며", 세상에 이름을 내어 재물을 취하려는 사람이라고지적하였다. 그가 돌아가려고 하였던 것은 동중서가 묘사한 체험세계였다. 이 후풍지동의 창시자는 지진에 대해 상주하면서 정치가 올바르면 좋은 징조가 나타나고, 정치가 올바르지못하면 나쁜 징조가 나타납니다.
그림자나 메아리보다도 빠릅니다. 행동하는 것에 일정한 법칙이 없고 올바른 도리를 바꾸면 천등이 치고 땅이 갈라지는 재이가하늘과 인간이 감응하는 것은있게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가 만든 혼천의는 뚜렷하게 역위건착도류의 우주관을 표상한다. 해와 달의 운행으로 길흉을 드러내고,오성의 경도차로 화복을 고하니 하늘의 마음은 여기에서 드러난다. 장형이 도참을 반대한 것은 실상 변질을 반대한 것이었다. 그는 허위를 버리고 진실한 세계를 만나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그의 노력은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변질이 시대의 추세였으므로 그것을 되돌리기는 어려웠다. 후한시대에는 유학자들 사이에서 금고문 논쟁이 벌어졌으나 도참을 믿지 않는 자는 드물었다. 고문경전인 춘추좌씨 전은 도참의 힘을 빌어 새함게 중요한 지위를 확보하였다. 후한 말 금고문을 통일한 정현도 오로지 위서와 '상서만을 믿었다"고 한다. 이것이도참의 지배를 받은 경직된 세계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