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테고리 없음

황로도

빠이팅맨 2021. 1. 16. 00:06

한 무제는 제자백가를 내쫒고 유술만을 숭상하였다. 동중서 등이 구축한 천인 관계, 음양재이의 변화에 관한 유학은 황로술을 대신하여 관방철학이 되었다. 황로학의 지도자인 유안도 나라르 빼앗기고 죽었다. 그렇지만 황로술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신성방술도 궁정과 민간에서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다. 회남자가 만들어 낸 우주생성론도 전/후 한 교체기의 위서에서 다시 나타났다. 후한시대에 황로학은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후한서 초왕영전에서는 후한 광무제의 아들인 초왕 영이 다시 황로학을 좋아하고 불교를 배웠으며 몸을 재계하고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100년 후인 한 환제 때에는 궁중에 황제와 노자, 부처의 사당을 세웠으며 탁룡궁에서 황제와 노자를 제사지냈다. 제사에는 세 가지의 희생을 사용하였으며, 태관이 맛있는 음식을 진설ㅇ하고 음악을 연주하여 복을 빌었다. 황제와 노자, 부처를 같이 제사지내고 제천 의식을 모방하였지만 이것은 분명히 황제와 노자를 신선으로 보고 제사를 지낸 것이었다. 황제와 노자는 신선 숭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한대에 황로술은 시종일관 관방철학인 유학에 대항하는 힘이었다. 정통에 반항하였던 왕충은 스스로 자신의 학문을 유가의 학설에서 벗어나서 황로의 사상에 합치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민간의 반항 세력도 활오도를 신봉하였다. 후한 환제 때 궁중에서는 황제와 노자를 제사지냈지만 민간에서는 진경이 스스로 황제의 아들이라고 칭하였고 관백이 스스로 진인이라고 칭하면서 무장봉기를 일으켰다. 영제 때 장각은 태평도를 창시하였다. 후한서 황보슝전에서는 거록 사람 장각은 스스로를 태현량사라고 하면서...창천은 이미 죽었고 황천이 일어날것이다. 지금은 갑자의 해이니 천하가 크게 길할 것이다라는 요언을 퍼뜨렸다 고 하였다. 황천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말은 당시 유행하던 황가가 일어날 것이다라는 참어에 대응하는 것이다. 태평도에서는 황건을 황가 또는 황천의 부응으로 보았다. 황가라는 것은 황로도이다. 그러므로 황가가 일어날 것이다라는 말은 황로도에서 음양오행설에 입각해 만들어 낸 참어일 수 있다. 오행상생의 입각한 오덕종시설에 따르면 한나라는 화덕이고 한나라를 대신하는 왕조는 토덕이다. 토덕은 황색을 숭항한다. 황가가 일어날 것이다 라는 말이 혁명을 선양하고 있음을 쉽게 알 수있는 것이다. 후에 위나라는 황천이 일어날 것이다 라는 참어를 자신의 토덕의 상서로 보았다. 황색은 후세 도교에서도 신비적 의미를 갖는다. 도관에서는 황색을 숭상하였기 때문에 황관이라고 하며도사의 별칭이 된다. 이외에도 태평도의 반란 이전인 한 순제 때 장릉은 사천지방에서 오두미도를 창시하여 노자를 교주로 받들고 태상노군이라고 하였으며 노자오천문을 주요 경전으로 삼았다. 이 파는 나중에 도교의 정통으로 발전하였다. 

후한 말기에는 동중서 등이 창건한 대일통의 한대 유학이 이미 생명력을 읽는다. 그에 따라 대일통의 한제국도 최후의 붕괴를 맞이하게 되었다. 전자는 적어도 후자의 중요한 원인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배경 아래서 황로사상과 노장사상은 상층 문화의 영역에 다시 출현하였다. 위진현학은 노장을 본받아 서술하는 것이었따. 불교의 전파에 따라 고대 중국 문화의 발전은 새로운 시기로 진입하게 되었다. 여기에서 말하는 새로운 이라는 것은 그 현상과 색채를 가리켜서 말한 것이다. 근본적인 관념이나 체험세계는 변하지 않았다. 초기 불교가 황로사상에 의탁하여 전파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댓글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