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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형태는 의식 형태와 물질형태의 충돌을 포괄하는데,
그것은 근본적으로 관념체계의 충돌이다. 관념체계가 다르면
세ㄱ{ 역사 인생의 모습과 의미가 달라져 충돌의 근거를 낳는다.
새롭게 출현한 문화적 요소가 내륙 문화에 충격을 주고 그것을 와해 시킬때
내륙문화의 전통에서는 새로운 문화적 요소를 이단 사설로 지목하고 배
척하였다. 스스로를 내륙 문화의 계승자로 생각한 공자가 진나라
와 채나라 사이에서 배를 꿇고, 맹자가 제나라와 양나라에서 곤란을
겪은 것은 모두 상이한 세계관과 가치관이 충돌함으로써 빚어진 것
이다.
표면적인 문화 형 태는 붕괴될 수 있지만 심층적인 관념체계는 쉽
게 소멸되지 않는다. 상이한 관념체계가 충돌하는 과정은 종종 상호
개조하고 상호 동화하는 융합의 과정이기도 하다. 하나의 관념체계
가 충돌의 과정에서 다른 관념체계를 개조하고 동화하는 방향과 정
도가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각기 특색 있는 새로운 사상체계가 나타
난다. 춘추전국시대에 이루어졌던 여러 관념체계의 충돌과 융합의
과정에서 우리는 대략 세 가지 융합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1) 새로운 관념이 기존의 관념체계를 개조한 경우
이것은 선진유가가 채택한 방법이다. 유가의 창시자인 공자는 두
가지 '풍조'를 열었다. 하나는 사학의 풍조이다. 사학이 성립됨으로
여러 가지 새로운 사상체계의 생장을 위해 하나의 전범이 마련되
었고, 예악제도와 '관학' 체제의 붕괴가 가속화하였다. 시대의 추세를
되돌리려던 시도는 오히려 그것을 추동하는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두 번째는 기술을 통해 창작하는' 풍조이다. 공자는 육경을 강술하
고 전수할 때 경전의 뜻을 절취하여 입론의 근거로 삼았다. 가령
맹자이루, 하에는 그 뜻은 공자가 절취한 것이다라는 논
평이 있다. 공자 스스로도 주역을 해석하면서남쪽 사람들의 말
에 '사람이면서도 항상됨이 없으면 무당이나 의원도 되지 못할 것이
나 라는 것이 있으니 좋은 말이다.
'그 덕을 항상되게 아시 않으면 부끄러움을 얻을 것이다' 라고 하였으니
공자는 점을 치지 않을 따름이다' 라고 하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선왕의 도를 본받지 않는 '남쪽 사람들' 의 말을 사용하여
경문의 뜻을 해석한 것은 공자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이러한 방법을 통해 죽은경서를 살아 있는 성전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풍조가 성립되자 후세에는 스스로를 유자라고 칭하는 자가 끊이지 않게 되었다.
공자가해안 문화의 부응 관념의 영향을 받았다.
공자가 죽은 이후 유가는 여덟 개의 유파로 나누어졌다. 그 중에
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것은 맹자학파와 순자학파였다. 한비자'현
학, 에서는 그들을 "취하고 버리는 것이 서로 상반되고 같지
않으면서도 모두 스스로를 진실된 공자의 계승자라고 한다라고 포자하였다.
맹자는 자사의 문인에게 수업하여 공자를 계승하여 주문화를 발양
시키려는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옛날에 우왕이 홍수를 그치
게 하니 천하가 평온해졌고, 주공이 오랑캐를 물리치고 맹수를 몰아
내니 백성들이 편안해졌고, 공자가 춘추를 지으니 난신적자가 두
려워하였으며 나는 또한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여 사설을 없애고,
그릇된 행동을 막고, 음탕한 말을 내쫓아 세 분의 성인을
계승하려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순자는 자사와 맹자를 비웃으면서 재질은 격하고 뜻은 높으며, 보고 늘
은 것이 잡스럽다. 옛날 일들을 살펴서 새로운 학설을 만들고 그시을 오행이라고 한다.
그 학설이 매우 치우쳐서 조리가 없고, 난해하면서도 설명이 없고,
독단적이면서도 해설이 없다.라고 하였다.
재질은 격하고 뜻은 높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내륙 문화권의 태도와
상당한 거리를 느끼게 한다. 내륙 문화권의 사람들이 보기에
해안 문화권의 사람들은 보고 들은 것이 잡스런 특징을 가지고 있었다.
현존하는 자사와 맹자의 저작에는 오행에 관한말이 나오지는 않지만
편벽되어 조리가 없고, 난해하면서도 설명이없고, 독단적이면서도 해설이 없다고
할 만한 내용들이 발견된다.
그들이 창안한 학설도 옛날의 일들을 살펴서" 만들어 낸 것임에 틀
림없다. 그러나 이 때의 '옛날의 일'이란 내륙 문화의 경전에서 나
온 것이 아니라 해안 문화의 신화나 전설에서 나온 것이다.
실상 맹자나 순자나 모두 새로운 관념으로 기존의 체계를 개조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들은 모두 스스로를 공자의 진정한 계승자라고
하였지만 사실은 공자의 진정한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맹자나 순
자 모두 직하에서 머문 경력을 가지고 있는데, 특히 순자는 세 번에
걸쳐 재주'를 역임하였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이미 새로운 관념체
계가 현학으로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을 받은 것
은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대체로 자사나 맹자 일파는 음양가
의 사상을 이용하여, 그리고 순자 일파는 황로사상을 이용하여 내륙
문화의 관념체계를 개조하였다고 할 수 있다.